신축 빌딩의 서늘한 유리 외벽과 예리한 직선은 시각적으로 완벽한 질서를 보여주며 시선을 끈다. 하지만 이런 인위적인 완벽함이 주는 자극은 일시적인 감상에 그친다. 정작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것은 해 질 녘 창가에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나 바람에 힘없이 흩날리는 낙엽의 뒷모습을 때가 있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결국 소멸한다는 진리 앞에, 우리는 허무가 아닌 아련한 정취를 느낀다. 이것이 바로 모노노아와레(物の哀れ)다.
Etymology
- 物 (모노): 사물, 세상의 일 혹은 풍경
- 哀れ (아와레): 불쌍함, 가련함, 애처로움.
이 단어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아주 단순한 인간의 본능과 마주하게 된다. ‘아와레’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림이 있을 때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아아’하고 내뱉는 감탄에서 유래했다.
직역하면 ‘사물에 깃은 비애’다. 18세기 일본의 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세상의 만물을 마주할 때 가슴 깊이 차오르는 감성”이라 정의했다.
즉, 모노노아와레는 단순히 슬픔 감정이 아니라, 세상의 만물을 마주하며 가슴 깊이 차오르는 말할 수 없는 감동인 셈이다.
The Sensitivity to Ephemera
이치고이치에가 단 한 번뿐인 순간에 대한 집중이라면, 모노노아와레는 그 순간이 결국 지나가 버릴 것임을 아는 자의 애정이다.
화려하게 만개한 벚꽃보다, 떨어지는 꽃잎을 보며 더 깊은 아름다움을 느끼는 마음. 그것은 단순히 슬픈 것이 아니라, 유한한 존재들이 내뿜는 찬란한 생명력에 대한 감동이다.
와비사비가 낡은 물건의 겉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면, 모노노아와레는 그 풍경을 바라보는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파동을 다룬다. 결점 없는 대리석에는 틈이 없지만, 비바람에 깎여 나가는 돌담의 위태로움에는 보는 이의 마음이 스며들 자리가 있다.
삶은 결국 상실의 연속이다. 계절이 바뀌고, 소중했던 사람들이 곁을 떠나며, 나 자신 또한 시간이라는 흐름 속에 마모되어 간다. 하지만 모노노아와레의 시선을 가진 이에게 세상은 허무한 공간이 아니다. 사라질 것을 알기에 지금 이 순간의 공기가 더 애틋하고, 언젠가 시들 것을 알기에 눈앞의 꽃이 더 눈부시게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영원히 붙잡아두려 애쓰며 산다. 하지만 가끔은 비워진 마음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에 다정한 슬픔 한 자락을 내어주면 어떨까. 떠나가는 것들을 억지로 붙잡지 않고 그 흐름을 묵묵히 바라보는 일. 그 고요한 태도 속에서 우리의 삶은 깊고 푸른 여운을 갖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