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타인의 공간에 머물기 위해, 우리는 때로 감사라는 이름의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일본에서의 정착을 결정하고 마주하게 된 서류더미. 그중에서도 부동산 계약서 위에 적힌 레이킨(礼金, 사례금)이라는 단어는 유독 낯설다. 한국의 전세나 월세가 익숙한 우리에게, 신뢰의 담보로 맡겨두는 보증금이나 집을 빌려쓰는 대가 외에, 돌려받지 못하는 사례금를 따로 내야한다는 사실은 차별이나 사기 등 많은 의문을 품게 한다.
이것은 단순히 지출해야 할 비용의 문제일까, 아니면 이 사회가 오랫동안 지켜온 보이지 않는 질서의 일부일까.
Etymology
- 礼 (예도 례): 예의, 감사, 사례
- 金 (쇠 금): 돈, 자산
문자 그대로 사례하는 돈이다. 전쟁이 끝난 직후 집 구하기가 어려운 시절, 집을 빌려준 주인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건네던 관습이 현대까지 이어진 것이다. 시키킨(敷金)과 달리 퇴거 시 절대로 돌려받지 못하는 비용이라는 점이 우리를 가장 당혹스럽게 하는 점이다.
Silent Selection
현재는 일본 사회에서도 레이킨에 대한 시선은 엇갈린다. 합리성을 중시하는 젊은 세대는 “왜 빌려 쓰는 사람이 돈을 더 내야 하는가”라며 의문을 제기하고, 실제로 ‘레이킨 0엔’ 매물들이 시장에 쏟아져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고급 맨션이나 인기 있는 주거 지역에는 견고한 레이킨의 벽이 세워져 있다.
레이킨을 단순히 집주인의 주머니를 채우는 수단이라고 생각하면 피곤해진다. 그것은 세입자를 선별하는 필터이자, 규칙과 질서를 존중하겠다는 암묵적인 약속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우리는 레이킨을 지불함으로써, 비로소 그 공간에 머물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게 된다.
레이킨은 그 공간이 가진 안정성, 즉 품격을 유지하기 위해 지불하는 입장료인 셈이다.
고마움에 가격을 매긴다는 것은 어쩌면 가장 자본주의적이면서도, 가장 인간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불한, 혹은 지불할 ‘감사의 가격’은 어떤 의미로 기억될 것인가. 일본에서의 첫 번째 레이킨을 지불하며, 그 돈이 단순히 사라지는 비용이 아니라 이 낯선 땅과 맺은 첫 번째 신뢰의 증표라고 믿어보는 건 어떨까.